# 죄를 사하여 주시는 것을 믿습니다
사도신경 강해 시리즈의 마지막 시간입니다. 지난 몇 주 동안 우리는 그리스도인의 기본 신앙 고백을 하나씩 짚어 보면서, 그 믿음이 우리의 삶과 제자도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를 살펴보았습니다. 우리가 무엇을 믿는가 뒤에 있는 왜를 이해할 때, 우리는 세상으로 나아가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를 삼을 담대함을 얻게 됩니다.
## 오늘의 말씀
**요한일서 1장 5절부터 10절**
우리가 그에게서 듣고 여러분에게 전하는 소식은 이것입니다. 하나님은 빛이시요, 그분 안에는 어둠이 조금도 없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과 사귐이 있다고 하면서 어둠 속에서 걸어간다면, 우리는 거짓말을 하는 것이며 진리를 행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분이 빛 가운데 계신 것처럼 우리도 빛 가운데서 걸어간다면, 우리는 서로 사귐이 있고 그의 아들 예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합니다. 우리가 죄가 없다고 말한다면 우리는 자기를 속이는 것이고 진리가 우리 안에 없는 것입니다.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그분은 신실하시고 의로우셔서 우리 죄를 용서하시고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하게 하십니다. 우리가 죄를 짓지 않았다고 말한다면 우리는 하나님을 거짓말쟁이로 만드는 것이며 그분의 말씀이 우리 안에 없는 것입니다.
**에베소서 4장 31절부터 32절**
모든 악독과 노함과 분냄과 떠드는 것과 비방하는 것을 모든 악의와 함께 버리십시오. 서로 친절하게 대하며 불쌍히 여기며,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여러분을 용서하신 것같이 여러분도 서로 용서하십시오.
**마가복음 11장 25절**
서서 기도할 때에 누군가에게 원망할 일이 있으면 용서하십시오. 그래야 하늘에 계신 여러분의 아버지께서도 여러분의 잘못을 용서해 주실 것입니다.
## 로마 세계에서 용서는 미덕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이 사셨던 1세기 로마 문화권에서 용서는 미덕이 아니었습니다. 자비는 나약함으로 여겨졌습니다. 세네카나 키케로 같은 로마의 철학자들은 자비를 강한 지도자나 시민에게 어울리지 않는 태도로 보았습니다.
로마의 이상은 정의와 명예였습니다. 누군가 나에게 잘못을 저질렀다면 기대되는 반응은 보복이었습니다. 되갚아 주고, 내가 우위에 있음을 확실히 보여 주는 것이었습니다. 물론 정치적 이익을 위해 용서를 베푸는 경우는 있었지만, 그것이 긍휼에서 나온 적은 없었습니다.
그런데 때때로 오늘날 우리 사회에서 소위 가장 그리스도인다운 목소리라고 하는 이들 중 일부가 이 오래된 로마식 가치 체계를 그대로 받아들인 것처럼 보일 때가 있습니다. 그들은 용서하는 일보다 다른 사람의 죄를 지적하는 일에 훨씬 더 관심이 많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기독교 신앙의 강조점이 아니며, 사도신경의 강조점도 아닙니다.
## 사도신경은 죄가 아니라 용서를 고백합니다
우리는 사도신경에서 "나는 인간이 죄인임을 믿습니다"라고 고백하지 않습니다. 물론 공정하게 말하자면 그것은 이미 전제되어 있습니다. 사도신경이 말하는 것은 이것입니다.
**나는 죄를 사하여 주시는 것을 믿습니다.**
사도신경과 기독교 신앙의 강조점은 죄책이 아니라 은혜에 있습니다. 죄가 아니라 용서에 있습니다.
물론 이 고백은 우리에게 용서가 필요하다는 사실을 이해하지 못한다면 큰 의미가 없습니다. 용서는 하나의 문제에 대한 답이며, 영적인 문제에 대한 영적인 처방입니다. 우리에게 문제가 있다는 것을 모른다면, 우리는 그 해답을 찾아 나서지 않을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은 이 문제를 세 가지 질문으로 살펴보려고 합니다.
1. 누구에게 용서가 필요한가
2. 하나님은 우리의 죄를 용서하실 것인가
3. 우리도 다른 사람을 용서해야 하는가
## 첫 번째 질문: 누구에게 용서가 필요한가
죄를 사하여 주시는 것을 믿는다는 고백이 좋은 소식이 되려면, 먼저 우리에게 용서가 필요하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려면 죄에 대한 짧은 이야기가 필요합니다.
신약성경에서 죄를 가리키는 대표적인 헬라어 단어는 **하마르티아**입니다. 이 단어는 활쏘기에서 과녁을 빗나가는 것을 가리키는 말이기도 했습니다.
궁수가 쏜 화살이 겨냥한 표적을 빗나가듯이, 사람은 생각과 말과 행동에서 과녁을 빗나갑니다. 다시 말해 우리가 마음으로 사랑하고 지향하는 이상이 있습니다. 그것을 거룩함이라 부르든 성화라 부르든 말입니다. 그러나 우리 모두는 그 이상에, 그 표적에 미치지 못합니다. 과녁을 빗나가는 것을 가리키는 신학 용어가 바로 죄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거의 매일같이 과녁을 빗나가고 있기 때문에, 매일같이 용서가 필요한 자리에 서 있습니다.
### 죄가 만들어 내는 단절
죄가 우리 삶에 남기는 여러 결과 가운데 하나는 소외와 단절입니다. 하나님으로부터의 단절만이 아니라 사람들로부터의 단절입니다.
부활의교회 아담 해밀턴 목사님이 이런 이야기를 전한 적이 있습니다. 습관적으로 다른 사람에게 상처가 되는 말을 하면서도, 자신이 어떤 해를 끼치고 있는지 인식하지 못하는 한 남자가 있었습니다. 사람들이 몇 번이고 그 점을 지적해 주었지만, 그는 늘 자기 행동을 합리화하고 그들의 말을 완전히 무시해 버렸습니다.
시간이 흐르면서 그는 자기 삶에 있던 사람들을 하나씩 하나씩 잃어버렸고, 인생의 끝에 이르렀을 때 그의 곁에는 아무도 남아 있지 않았습니다.
그 과정의 어느 시점에서든 그는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고, 용서를 구하고, 친구들과 가족과 화해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그렇다면 누구에게 용서가 필요합니까? 우리 모두입니다. 한 사람도 예외 없이, 모든 사람에게 용서가 필요합니다.
## 두 번째 질문: 하나님은 우리의 죄를 용서하실 것인가
여기에는 양극단이 있습니다.
한쪽 끝에는 자신에게 용서가 필요하다고 생각하지 않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대개 자기 삶 속의 죄를 보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그런 사람들을 알고 있고, 공적인 자리에서 그런 말을 하는 이들을 본 적도 있습니다.
그런데 스펙트럼의 반대쪽 끝에는 하나님이 자기를 용서하실 수 있는지, 용서하시려 하는지 확신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여러 이유로 무거운 죄책의 짐을 지고 살면서, 하나님은 결코 나를 용서하지 않으실 것이라고 굳게 확신하는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이 이미 용서하셨다는 것은 더더욱 믿지 못합니다.
어느 정도의 자책과 죄책감이 반드시 나쁜 것은 아닙니다. 그런 감정은 우리를 회개로, 화해로, 그리고 같은 잘못을 반복하지 않는 삶으로 이끌 수 있습니다.
그러나 제가 목회하면서 발견한 것은, 지나친 죄책감을 지고 살아가는 사람들, 하나님의 은혜를 믿는 것을 어려워하는 사람들은 대개 하나님에 대한 이해가 너무 작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마땅히 삶을 누려야 할 때에도 죄책감을 느낍니다. 아무리 애써도 하나님의 기대에 결코 미치지 못할 것이라고 느낍니다.
성경은 하나님이 긍휼이 풍성하시고 인자하심이 넘치는 분이라고 몇 번이고 반복해서 말하는데도 말입니다.
### 예수님이 보여 주신 하나님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고백을 나눌 때 우리가 이야기했듯이, 예수님은 하나님의 성품과 뜻을 드러내시려고 이 땅에 오셨습니다. 그리고 탄생에서 부활에 이르기까지 예수님은 죄인들에게 은혜와 용서를 베푸셨습니다.
요셉이 마리아의 아들의 이름을 예수라 하라는 지시를 받은 이유도 바로 그것입니다. 그가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하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복음서 전체에서 예수님은 죄를 용서하시려는 하나님의 마음에 대해 이야기하시고 비유를 들려주셨습니다. 예수님이 우리에게 계시하신 하나님은, 우리가 구하려는 마음보다 용서하시려는 마음이 더 크신 분입니다.
## 은혜는 불공평합니다
몇 주 전에 우리가 은혜라는 주제로 다시 돌아오겠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용서는 결국 은혜의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선물, 값없이 주어지는 선물, 우리가 받기만 하면 되는 선물입니다.
기독교가 가져온 이 은혜의 개념은 너무 단순해서 오히려 불쾌하게 느껴질 정도입니다. 은혜는 불공평하고, 불편하며, 전혀 값없이 주어집니다. 은혜란 내가 벌 수도 없고 받을 자격도 없는 것을 받는 일입니다.
은혜는 상급이 아닙니다. 거래가 아닙니다. 정말 열심히 노력한 사람에게 주는 상품이 아닙니다. 그것은 선물입니다.
은혜는 점수판을 무시합니다. 은혜는 이렇게 말합니다.
**당신의 가장 좋은 날도, 당신의 가장 나쁜 날도, 하나님 앞에서의 당신의 자리를 결정하지 못한다.**
### 병원 병동에서 만난 한 사람
수요일 아침 성경공부 모임에서도 나눈 이야기입니다만, 저는 목사로서 그리고 변호사로서 오랜 세월 동안 정말 많은 고백을 들어 왔습니다. 배신, 법을 어긴 일, 부모로서의 실패, 외도, 중독, 그리고 듣는 사람의 머리카락이 곤두설 만한 일들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후에 우리는 회개와 화해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그중에서도 가장 선명하게 기억에 남는 일은 신학교 시절, 임상목회교육 과정으로 큰 병원에서 원목 인턴으로 섬길 때 있었던 일입니다.
어느 저녁, 저는 정신건강 병동에서 한 환자와 함께 앉아 있었습니다. 그분은 성경을 아주 잘 아는 분이었습니다. 그러면서도 자신이 저지른 일에 대해 하나님이 결코 용서하지 않으실 것이고 용서하실 수도 없다고 굳게 확신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누가복음 15장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잃어버린 동전, 잃어버린 양, 잃어버린 아들의 이야기입니다. 사실 그분은 그 본문을 아주 잘 알고 있었습니다.
저는 이렇게 물었습니다.
"예수님이 하나님께서 그 모든 것을 찾아 나서신다고 말씀하셨다면, 하나님이 당신을 찾으실 때까지 찾지 않으시겠습니까? 그리고 찾으신 후에 기뻐하지 않으시겠습니까?"
그때 그분의 얼굴에 빛이 비쳤습니다. 하나님이 베푸시는 용서가 자신에게도 속한 것임을 마침내 깨달은 것입니다.
우리가 사도신경의 이 대목을 함께 고백할 때, 우리는 성경의 진리를 확언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기꺼이 용서하시며, 우리를 우리의 짐에서 놓아 주기를 원하신다는 진리입니다.
우리는 우리가 저지른 최악의 일로 규정되는 존재가 아닙니다. 그리고 내일의 우리는 어제에 매여 살지 않아도 됩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용서하기 원하십니다. 우리는 다만 구하기만 하면 됩니다.
## 세 번째 질문: 우리도 다른 사람을 용서해야 하는가
답은 그렇습니다. 우리는 용서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복음서에서 이것을 몇 번이고 반복해서 가르치셨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매주 예배에서 함께 드리고 많은 분들이 매일, 혹은 그보다 더 자주 드리는 주기도문 안에도 들어 있습니다.
**우리가 우리에게 죄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시옵고.**
여러분, 이것은 그저 입에서 나오는 말이 아닙니다. 우리는 우리가 다른 사람을 용서하는 그 방식으로, 그 정도만큼 우리를 용서해 달라고 하나님께 구하고 있는 것입니다.
은혜는 그것이 모든 사람에게 적용된다는 사실을 깨닫기 전까지는 참 근사하게 들립니다. 자기가 받을 자격이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 사람들에게까지 적용된다는 사실 말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보기에 도무지 받을 자격이 없어 보이는 사람들에게까지 적용된다는 것을 알게 되면, 그때부터는 훨씬 더 어려워집니다.
그런데 용서를 통해 자유를 얻는 첫 번째 사람은 용서하는 바로 그 사람입니다. 죄책과 수치와 쓴 뿌리와 원한에서 놓여나는 것입니다.
솔직히 고백하자면 저에게도 이것은 쉽지 않습니다. 저는 웬만해서는 화를 잘 내지 않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한번 잘못했다고 생각하고 한번 화가 나면, 그것을 아주 오래 붙들고 있으려는 성향이 있습니다.
## 용서에 대한 세 가지 오해
용서를 이야기할 때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할 것들이 있습니다.
**첫째, 용서는 상대방이 한 일을 괜찮다고 인정하는 것이 아닙니다.**
용서는 잘못을 없던 일로 만드는 것이 아닙니다. 용서는 그 일을 계속 붙들고 있지 않기로 선택하는 것이며, 그것을 상대방의 머리 위에 계속 들이대지 않기로 선택하는 것입니다.
**둘째, 용서는 잊는 것이 아닙니다.**
적어도 인간인 우리에게는 그렇습니다. 누군가에게 비밀을 털어놓았는데 그 사람이 신뢰를 저버렸다면, 그가 사과할 때 저는 용서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앞으로 그 사람에게 무엇을 나눌지에 대해서는 훨씬 더 신중해질 것입니다.
**셋째, 용서는 죄를 지은 사람을 모든 결과에서 풀어 주는 것이 아닙니다.**
사실 어떤 결과들은 구속적입니다. 어떤 결과는 배상의 형태로 법적으로 요구되기도 합니다. 그리고 결과를 감당하지 않는 것이 오히려 그 사람이 참으로 돌이키는 것을 가로막을 수도 있습니다.
## 십자가가 세상을 뒤집었습니다
용서라는 주제에 대해서는 이 자리에서 다 다룰 수 없을 만큼 훨씬 더 많은 이야기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가 무엇을 믿는지, 그리고 사도신경이라는 기본 신앙 고백에 무엇이 담겼는지를 생각할 때, 죄를 사하여 주시는 것을 믿는다는 이 고백이 그 안에 들어 있다는 사실은 참으로 중요합니다.
용서는 기독교 신앙의 본질적인 부분입니다. 복음은 용서를 선포합니다.
1세기 로마는 힘을 숭배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은 자신의 사랑을 드러내기 위해 약함을 택하신 구주를 예배했습니다. 십자가 위에서 원수를 저주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아버지여,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라고 부르짖으신 구주를 예배했습니다.
하나님의 용서가 로마 세계를 뒤집어 놓았습니다. 그리고 그 용서는 오늘도 여전히 세상을 뒤집고 있습니다.
우리가 죄를 사하여 주시는 것을 믿는다고 고백할 때, 우리는 세 가지를 인정하는 것입니다.
- 우리 모두에게 용서가 필요하다는 것
- 하나님은 우리의 죄를 기꺼이, 그리고 즉시 용서하기를 원하신다는 것
- 그리고 우리도 용서하라는 그리스도의 부르심을 받아들인다는 것
아멘.
## 함께 나눌 질문
1. 나는 나 자신의 삶에서 과녁을 빗나간 지점을 얼마나 정직하게 마주하고 있습니까?
2. 하나님이 나를 용서하신다는 사실을 머리로는 알면서도 마음으로 받아들이지 못하는 영역이 있습니까?
3. 지금 내가 붙들고 있는 원망이나 쓴 뿌리가 있습니까? 그것을 내려놓는 것이 왜 어렵습니까?
4. 용서하는 것과 잘못을 괜찮다고 인정하는 것은 어떻게 다릅니까? 내 삶에서 이 둘을 혼동한 적이 있습니까?
## 축복의 말씀
모든 악독과 노함과 분냄과 비방을 모든 악의와 함께 버리고, 서로 친절하게 대하며 불쌍히 여기며,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여러분을 용서하신 것같이 여러분도 서로 용서하십시오. (에베소서 4장 31절부터 32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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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를 사하여 주시는 것을 믿습니다
우리는 그 이야기의 속편입니다 — 승천일 설교
# 우리는 그 이야기의 속편입니다 — 승천일 설교
**본문: 누가복음 24장 44~53절**
**설교자: (순회 감독, 인디애나 연회, 연합감리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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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말씀 본문
>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내가 전에 너희와 함께 있을 때에, 너희에게 말하기를, 모세의 율법과 예언서와 시편에 나를 두고 기록한 모든 것이 반드시 이루어져야 한다고 하였다.’ 그 때에 예수께서는 성경을 깨달을 수 있도록 그들의 마음을 열어 주셨다. 그리고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성경에 기록하기를, 그리스도는 고난을 받고, 사흘째 되는 날에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살아날 것이며, 죄를 용서받게 하는 회개가 예루살렘에서 시작하여 모든 민족에게 선포될 것이라고 하였다. 너희는 이 일의 증인이다. 나는 내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것을 너희에게 보낼 것이니, 너희는 위로부터 오는 능력을 입을 때까지 이 성에 머물러 있어라.’ 예수께서는 그들을 베다니 근처까지 데리고 나가서, 손을 들어 그들에게 복을 빌어주셨다. 그리고 그들에게 복을 빌어 주시면서, 그들을 떠나 하늘로 올라가셨다. 그들은 그에게 경배하고, 크게 기뻐하면서 예루살렘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늘 성전에 있으면서 하나님을 찬송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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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들어가며: 교회력이라는 선물
설교자는 오랜 목회 여정을 마무리하는 시점에 이 설교를 전했습니다. 그는 먼저 **교회력(Christian Year)** 의 의미를 이야기합니다.
> “교회력은 세상의 시간 흐름에 맞서, 우리가 시간을 다르게 살아간다는 것을 선언하는 방식입니다.”
교회력에는 빛으로 충만한 절기들, 즉 크리스마스, 부활절, 성령강림절이 있는가 하면, 사순절처럼 조용히 내면을 들여다보는 계절도 있습니다. 그리고 가장 긴 계절인 **‘연중 시기(Ordinary Time)’** 가 있습니다. 설교자는 이 ‘평범한 시간’이야말로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시는 진짜 삶의 자리라고 말합니다.
그 연중 시기가 시작되기 직전, 오늘은 **승천일(Ascension Day)**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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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승천, 그것이 말하는 것
승천은 예수님이 우리를 떠나 사라지신 사건이 아닙니다. 설교자는 이렇게 강조합니다.
> “승천은 예수님을 단지 위대한 인간 선지자나 훌륭한 스승으로 이해하는 것에 머물지 않도록 막아 주는 신학적 닻입니다.”
예수님은 완전한 인간이셨습니다 — 우리의 슬픔을 아시고, 우리의 연약함을 아시는 분. 그러나 동시에 완전한 하나님이십니다. 승천은 바로 이 **그리스도의 두 본성**을 우리가 붙들도록 돕습니다.
성경은 이를 여러 곳에서 증언합니다:
- **로마서 8:34** — 그리스도께서는 죽으셨을 뿐 아니라, 다시 살아나사 하나님 우편에 계시면서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십니다.
- **에베소서 1장** — 하나님은 그리스도를 죽은 자들 가운데서 살리시고 하늘에서 자기 오른편에 앉히셨습니다.
- **골로새서 3:1** — 여러분은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심을 받았으니, 위에 있는 것들을 추구하십시오.
- **베드로전서 3:22** — 그는 하늘에 올라가셔서, 하나님의 오른편에 계시며, 천사들과 권세들과 능력들이 그에게 복종하고 있습니다.
승천일은 부활의 기쁨이 절정에 이르는 날입니다. 부활절이 하나의 ‘시작점’이라면, 승천일은 그 이야기에 **책갈피**를 꽂는 날입니다 — “이 기쁨은 영원하다”는 선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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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열린 마음, 열린 말씀
본문 45절, “그때에 예수께서는 성경을 깨달을 수 있도록 그들의 마음을 열어 주셨다.”
설교자는 이 ‘마음을 여심’이 이 장면에만 등장하는 것이 아님을 지적합니다. 엠마오 도상의 두 제자에게도, 에티오피아 내시에게도 같은 일이 일어났습니다. 성경은 단순히 읽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마음을 열어 주실 때 비로소 살아납니다.**
설교자는 존경하는 동료 목사의 말을 인용합니다:
> “설령 그 본문을 100번 읽었다 해도, 설교를 준비할 때는 다시 한 번 읽으십시오. 세상이 변하기 때문입니다. 그 말씀이 오늘 이 세상에서 무엇을 말하는지 다시 들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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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는 증인입니다
48절, “너희는 이 일의 증인이다.”
설교자는 말합니다: “나는 내가 본 것만 증언할 수 있습니다. 당신도 마찬가지입니다.”
증인은 거창한 신학자가 아니어도 됩니다. 증인은 다른 사람의 경험이 아니라, **내 삶 속에서 하나님이 하신 일**을 이야기하는 사람입니다.
-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당신의 삶에서 어디서 보았습니까?
- 너무나 벅차서 그냥 하나님을 찬양할 수밖에 없었던 순간이 있었습니까?
- 낮고 어두운 골짜기에서 하나님이 함께하셨던 기억이 있습니까?
> “당신이 예수님 안에서 살아온 이야기 — 그것이 당신의 증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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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령을 기다리라, 그러나 가라
49절, “나는 내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것을 너희에게 보낼 것이니, 위로부터 오는 능력을 입을 때까지 이 성에 머물러 있어라.”
승천은 예수님이 우리를 버려두시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성령을 보내심으로 **더 가까이** 임하시는 방식으로의 전환입니다. 승천 → 성령강림으로 이어지는 이 흐름이 바로 오순절의 기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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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축복하며 떠나시다
50절, “예수께서는 그들을 베다니 근처까지 데리고 나가서, 손을 들어 그들에게 복을 빌어주셨다.”
설교자는 여기서 잠시 멈춥니다. **축복(Blessing)** — 이것은 우리 시대에 많이 잊힌 행위입니다.
그는 존 트렌트의 책 《축복(The Blessing)》을 언급하며, 부모가 자녀에게 의도적으로 축복을 선언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이야기합니다. 예수님이 마지막으로 제자들에게 하신 것이 바로 그 축복이었습니다.
> “예수님은 우리에게 복을 주시고, 그 복을 우리가 세상으로 가지고 나가도록 보내십니다 — 우리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우리가 만나는 모든 이들을 위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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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는 그 이야기의 속편
제자들은 예수님이 하늘로 올라가시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슬픔이 아닌, **큰 기쁨으로** 예루살렘으로 돌아갔습니다. 그들은 성전에서 끊임없이 하나님을 찬양했습니다.
설교자는 이것이 승천일의 핵심이라고 말합니다:
> “승천일은 일종의 파송입니다. 이것은 끝이 아닙니다. 이것은 우리에게 맡겨진 사명의 시작입니다. 우리는, 여러분과 나는, 하나님이 하신 일의 ‘속편’입니다.”
요한 웨슬리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 “죄 외에는 아무것도 두려워하지 않고, 하나님 외에는 아무것도 원하지 않는 100명의 설교자를 내게 달라. 그들이 성직자이든 평신도이든 상관없다. 그들만이 지옥의 문을 흔들고 땅 위에 하나님의 나라를 세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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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무리: 가장 진실한 당신으로
설교자는 마무리하며 고백합니다. 자신은 웨슬리처럼 웅변가도 아니고, 찰스 스펄전처럼 유창하지도 않다고. 그러나 그는 이것을 압니다:
> “우리가 가장 진정성 있는 자신일 때, 우리의 증언은 가장 강력합니다.”
그는 자신의 소명을 이렇게 정의합니다: **“은혜가 너무나 필요한 이 세상 속에서 은혜를 껴안는 사람.”**
사람들이 자신을 볼 때, 죄인임을 알지만 은혜로 구원받고 성령의 능력으로 변화되어 가는 사람을 보기를 소망한다고 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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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도신경으로 마치며
설교자는 사도신경으로 설교를 맺습니다:
> “…성령을 믿으며, 거룩한 공교회와 성도의 교제와 죄를 사하여 주시는 것과 몸의 부활과 영생을 믿사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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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가며: 오늘 나에게 주어진 질문
승천일이 우리에게 묻습니다:
1. 나는 **예수님의 두 본성** — 완전한 인간, 완전한 하나님 — 을 붙들고 있는가?
1. 나는 **내 삶의 증인**으로서 어떤 이야기를 가지고 있는가?
1. 나는 오늘 **누구에게 축복**을 전하고 있는가?
1. 나는 **가장 진실한 나 자신**으로 세상 속에 서 있는가?
> “주님이 하늘에 오르셨습니다. 하나님의 오른편에 앉으셨습니다. 그리고 그분은 우리를 그 이야기의 다음 장으로 보내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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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설교는 승천주일(Ascension Sunday)에 전해진 말씀을 정리한 것입니다.*
선한 목자의 음성을듣는다는 것
선한 목자의 음성을
듣는다는 것
Good Shepherd Sunday — 요한복음 10장 1–10절
"나는 양의 문이라. 나로 말미암아 들어가는 자는 구원을 받고
또는 들어가며 나오며 꼴을 얻으리라.
도둑이 오는 것은 도둑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것뿐이요,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
선한 목자 주일이란
매년 부활절 후 네 번째 주일은 '선한 목자 주일(Good Shepherd Sunday)'로 불립니다. 성경은 목축과 농경의 언어로 가득 차 있습니다. 양 떼와 목자, 초장과 우리(羊舍)… 오늘의 우리보다 훨씬 더 가까이 자연과 먹거리에 닿아 살았던 사람들이 쓴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설교자는 고백합니다. "나는 2000년 전 농경에 대해 충분히 알지 못합니다. 그래서 처음 이 본문을 설교할 때, 양이 얼마나 어리석은 동물인지를 과장했습니다." 그러나 양을 직접 기르던 교인에게 지적을 받았습니다. 양은 가장 영리한 동물은 아니지만, 세간의 편견처럼 멍청하지도 않다는 것을.
우리가 예수님의 양이라면, 우리 역시 그렇습니다. 완벽하지 않지만, 결코 어리석지만은 않은 존재. 우리에게는 우리만의 순간들이 있습니다.
목자와 양의 관계 — 1세기 목축 현장
성탄절 이야기 속 "들판에서 양 떼를 지키던 목자들"을 떠올려 보십시오. 당시 목자들은 공동의 방목지를 함께 사용했습니다. 낮에는 여러 목자의 양 떼가 함께 풀을 뜯고, 밤이 되면 각자의 돌담 우리로 돌아왔습니다. 목자는 바로 그 문에서 자거나 앉아 문을 지켰습니다.
예수님이 "나는 양의 문이요, 나는 선한 목자"라고 말씀하신 것은 바로 이 현장을 배경으로 합니다. 목자 한 명이 문이 되어 양 떼 전체를 지키는 그림, 2000년 전에도 지금도 여전히 이어지는 방식입니다.
특히 놀라운 사실이 있습니다. 여러 목자의 양 떼가 섞여 함께 풀을 뜯다가도, 각 목자가 휘파람을 불거나 특유의 소리를 내면, 자기 목자의 목소리를 아는 양들만 그 소리를 따라 무리에서 나와 제 목자를 따른다고 합니다.
"양들은 목자의 목소리를 압니다.
우리 역시 선한 목자의 음성을
알아들을 수 있습니다."
넘쳐나는 목소리들 속에서
2011년 연구에 따르면, 그 당시 인류 한 사람이 하루에 받아들이는 정보의 양은 25년 전보다 무려 5배에 달했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15년 전 이야기입니다. 일부 연구자들은 오늘날 우리가 몇 달 동안 받는 정보가 500년 전 가장 학식 높은 사람이 평생 받았던 정보량과 맞먹는다고 말합니다.
수많은 목소리들이 우리의 주의를 차지하려 경쟁합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 어떤 목소리를 따라야 하는지, 나는 누구에게 속해 있는지, 어디로 가야 하는지를.
선한 목자의 음성을 분별하는 법
예수님은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도둑은 훔치고, 죽이고, 멸망시키러 오지만, 선한 목자는 풍성한 생명을 주러 옵니다. 설교자는 이것을 분별의 기준으로 제시합니다:
- 그 목소리가 풍성함과 선함으로 이끌고 있는가? 그렇다면 따르라.
- 어떤 이들은 가지고, 다른 이들은 갖지 못하게 하는 목소리라면, 그것은 강도의 목소리일 수 있다.
- 파괴와 폭력을 조장하거나 부추기는 목소리는, 아무리 크고 설득력 있어도 선한 목자의 음성이 아니다.
- 친절, 배려, 돌봄을 들려주고, 초록 목장과 잔잔한 물가로 이끄는 목소리 — 그것이 목자의 음성이다.
설교자는 주중에 두 번의 대형 콘서트에 다녀왔다고 고백하며, 처음으로 귀마개를 사용했다고 말합니다. "15데시벨을 걸러내도 노래는 들을 수 있었습니다. 앞으로도 계속 들을 수 있으려면 지금 조금 줄여야 합니다." 우리의 영적 귀도 마찬가지입니다. 해로운 소음을 걸러내야, 진짜 목소리가 들립니다.
어떻게 잘 들을 수 있을까
설교자는 SNS를 자주 확인할수록 오히려 마음이 불편해진다는 것, 뉴스와 논평에 너무 깊이 귀를 기울일 때 균형을 잃는다는 것을 솔직하게 나눕니다. 정확한 정보와 편향된 목소리 사이에서 어떻게 분별할 것인가 하는 것은 끊임없는 질문입니다.
이 분별의 과정에서 전통적인 영적 훈련들이 도움이 됩니다:
- 기도와 고요함 — 침묵 속에서 목자의 음성이 더 잘 들립니다.
- 성경 읽기 — 오늘 우리가 직면한 문제의 선례는 이미 말씀 안에 있습니다.
- 믿음의 공동체 — 함께 듣고, 함께 배우는 것. 여러분은 무엇을 들었나요?
- 일상의 이웃 — 선한 목자의 양 떼는 넓습니다. 모든 선함과 지혜는 하나님께로부터 옵니다.
선한 목자는 잠들지 않습니다. 우리가 예배당을 떠난 후에도 우리 곁을 떠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손을 내미시는가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가 얼마나 잘 듣고 반응하는가의 문제입니다.
"이 비유에서 양이 되어야 한다면,
적어도 선한 양이 됩시다.
선한 목자와 함께한다면,
그 음성을 알아듣는 양이 됩시다."
선한 목자이신 주님, 감사합니다.
우리를 돌보시고, 초록 목장과 잔잔한 물가로 인도하소서.
우리가 주님의 음성을 알아듣고, 그 선하심과 인자하심을
이웃과 나누는 양이 되게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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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 위에서 만난 부활: 보지 못했던 것을 알아보는 순간
길 위에서 만난 부활: 보지 못했던 것을 알아보는 순간
오늘의 말씀은 누가복음 24장 13–34절, 흔히 ‘엠마오로 가는 길’ 이야기로 알려진 장면입니다. 두 제자가 절망 속에서 예루살렘을 떠나던 길, 그들과 함께 걸었던 이가 바로 예수였지만 그들은 처음에는 알아보지 못합니다. 이 장면은 단순한 이야기라기보다, 우리의 일상과 신앙을 깊이 비추는 거울과도 같습니다.
⸻
절망 속에서 시작된 여정
두 제자는 큰 기대를 품었던 예수의 죽음 이후 깊은 상실감에 빠져 있었습니다.
그들이 떠난 예루살렘은 더 이상 희망의 장소가 아니라, 실패와 슬픔의 상징이었습니다.
그들은 말합니다.
“우리는 그가 이스라엘을 구원할 줄로 기대했다.”
이 한 문장에는 무너진 기대, 그리고 방향을 잃은 삶이 담겨 있습니다.
우리 역시 비슷한 순간을 살아갑니다.
기대했던 일이 무너지고, 믿었던 것이 흔들릴 때, 우리는 과거에 묶이거나 아직 오지 않은 미래에 집착하며 현재를 놓치곤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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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께 걷고 있었지만 알아보지 못한 이유
흥미로운 점은 예수가 그들과 함께 걷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그를 알아보지 못했다는 사실입니다.
이 장면은 단순한 ‘기적의 지연’이 아니라, 인간의 인식 방식에 대한 깊은 통찰을 담고 있습니다.
그들은 과거 사건에 몰두하고 있었습니다.
또한, 이미 사라진 미래를 붙잡고 있었습니다.
결국 그들은 지금 이 순간을 보지 못했습니다.
이 부분은 우리에게 중요한 질문을 던집니다.
* 우리는 현재를 얼마나 인식하고 있는가
* 우리는 이미 일어난 일이나 아직 오지 않은 일에 얼마나 사로잡혀 있는가
⸻
눈이 열리는 순간: 떡을 떼는 자리에서
결정적인 전환은 식탁에서 일어납니다.
예수가 떡을 들어 축복하고 나누는 순간, 그들의 눈이 열립니다.
그제야 그들은 깨닫습니다.
“아, 우리가 함께 걸었던 그분이 바로 예수였구나.”
그리고 서로 말합니다.
“길에서 말씀하실 때, 우리의 마음이 뜨겁지 않았던가?”
이 장면은 단순한 인식의 변화가 아니라, 내면의 각성입니다.
이미 느끼고 있었지만 이해하지 못했던 것을, 비로소 깨닫는 순간입니다.
⸻
현대적 비유: 우리는 무엇을 놓치고 있는가
설교에서는 Joshua Bell의 일화가 소개됩니다.
세계적인 바이올리니스트가 지하철에서 연주했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를 알아보지 못하고 지나쳤습니다.
이 이야기는 매우 직설적인 메시지를 전달합니다.
우리는 종종
가장 중요한 것, 가장 아름다운 것, 가장 의미 있는 것을 바로 앞에서 놓친다는 것입니다.
엠마오의 두 제자처럼,
우리는 이미 함께하고 있는 ‘의미’를 인식하지 못한 채 살아가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
부활의 삶을 사는 세 가지 방식
이 본문에서 도출되는 핵심 메시지는 세 가지로 정리됩니다.
1. 주의 깊게 바라보기 (Pay Attention)
주의 깊게 산다는 것은 단순히 집중하는 것이 아니라,
열린 마음으로 지금 이 순간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 과거에 묶이지 않고
* 미래에 도망가지 않고
* 현재를 살아가는 것
바로 이 순간이 의미가 드러나는 자리입니다.
⸻
2. 놀라움을 경험하기 (Be Astonished)
정말로 주의 깊게 살기 시작하면, 우리는 놀라움을 경험하게 됩니다.
* 일상의 아름다움
* 타인의 선함
* 관계 속의 회복
이 모든 것은 그냥 지나칠 수도 있지만,
깊이 바라보면 우리를 변화시키는 ‘경이’가 됩니다.
⸻
3. 그것을 나누기 (Tell About It)
두 제자는 깨달은 즉시 예루살렘으로 돌아가 다른 이들에게 전합니다.
놀라움은 혼자 간직할 때 완성되지 않습니다.
말하고, 행동하고, 나눌 때 그것은 삶을 변화시키는 힘이 됩니다.
⸻
결국 질문은 이것입니다
* 부활은 내 삶에 어떤 변화를 만들고 있는가
* 나는 지금 무엇을 보고 있는가
* 나는 무엇에 놀라고 있는가
* 그리고 그것을 어떻게 살아내고 있는가
⸻
마무리
엠마오로 가는 길은 과거의 이야기이면서 동시에 우리의 이야기입니다.
예수는 여전히 우리와 함께 걷고 있지만, 우리가 그것을 인식하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의 메시지는 단순합니다.
지금 이 순간을 보라.
놀라움을 느끼라.
그리고 그것을 살아내라.
그때 비로소 우리는 말할 수 있게 됩니다.
부활은 단순한 사건이 아니라, 지금 여기에서 살아가는 삶이라는 것을.
부활은 시간이 걸립니다
Opening Prayer
시작 기도
English
Join us on the path of life, and lead us into your presence where there is fullness of joy through the reading and proclamation of your word. Amen.
한국어
생명의 길로 우리를 인도하시고, 말씀을 읽고 선포하는 가운데 기쁨이 충만한 주님의 임재로 이끌어 주소서. 아멘.
⸻
Gospel Reading: John 20:19–31
복음 말씀: 요한복음 20장 19–31절
English (Summary)
After the resurrection, Jesus appears to the disciples who are gathered behind locked doors in fear. He greets them with peace, shows them his wounds, and sends them out. Thomas, who was not present, doubts. A week later, Jesus appears again and invites Thomas to see and believe. Thomas responds, “My Lord and my God.” Jesus then declares that those who believe without seeing are blessed.
한국어 (요약)
부활 후, 두려움 속에 문을 잠그고 모여 있던 제자들에게 예수님이 나타나십니다. “평강이 있을지어다”라고 말씀하시며 자신의 상처를 보여주시고 그들을 세상으로 보내십니다. 그 자리에 없었던 도마는 믿지 못합니다. 일주일 후 다시 나타나신 예수님은 도마에게 직접 보고 믿으라고 하시고, 도마는 “나의 주님, 나의 하나님”이라고 고백합니다. 예수님은 보지 않고 믿는 자들이 복되다고 말씀하십니다.
⸻
One Mistake Does Not Define You
한 번의 실수가 당신을 정의하지 않습니다
English
Don’t you hate it when one mistake defines you forever? Thomas is often remembered only as “Doubting Thomas.” But the truth is, there is a little bit of Thomas in all of us.
한국어
한 번의 실수로 평생 평가받는 것이 싫지 않으신가요? 도마는 흔히 “의심 많은 도마”로만 기억됩니다. 그러나 사실 우리 모두 안에는 도마의 모습이 있습니다.
⸻
A Week After Easter
부활절 이후, 일주일
English
A week after Easter, the disciples are still in the same room, behind the same locked doors. If the resurrection is such a life-changing event, why hasn’t anything changed?
That question is not just about them. It is about us.
한국어
부활절이 지나고 일주일이 지났지만, 제자들은 여전히 같은 방, 같은 잠긴 문 뒤에 있습니다.
부활이 그렇게 큰 사건이라면 왜 아무것도 변하지 않은 걸까요?
이 질문은 제자들만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바로 우리의 이야기입니다.
⸻
Resurrection Is a Process
부활은 과정입니다
English
Here is the truth:
The resurrection is a big deal.
It changes lives.
But it takes time.
Resurrection is not a one-time moment. It is something we grow into. It is a way of living.
한국어
이것이 핵심입니다.
부활은 정말 중요한 사건입니다.
삶을 변화시킵니다.
하지만 시간이 필요합니다.
부활은 한 번의 순간이 아니라, 우리가 점점 자라가며 살아가는 방식입니다.
⸻
Facts vs. Story
사실과 이야기의 차이
English
Facts inform the mind.
Stories transform lives.
The empty tomb is a fact.
Resurrection is a story.
한국어
사실은 머리를 채웁니다.
이야기는 삶을 변화시킵니다.
빈 무덤은 사실입니다.
부활은 이야기입니다.
⸻
Thomas: More Than Doubt
도마는 의심만 있는 사람이 아닙니다
English
Thomas is not just the one who doubted.
He is also the one who said,
“My Lord and my God.”
Tradition says he later carried the gospel to India and died as a martyr.
That is not a story of failure. That is a story of transformation.
한국어
도마는 단지 의심한 사람이 아닙니다.
그는 또한 이렇게 고백한 사람입니다.
“나의 주님, 나의 하나님.”
전통에 따르면 그는 인도까지 복음을 전하고 순교했습니다.
이것은 실패의 이야기가 아니라 변화의 이야기입니다.
⸻
Your Starting Point
당신의 출발점
English
Where you are right now is your starting point.
Fear, confusion, doubt, pain
or
joy, gratitude, peace
Whatever it is, that is where your resurrection story begins.
한국어
지금 당신의 모습이 바로 출발점입니다.
두려움, 혼란, 의심, 고통
또는
기쁨, 감사, 평안
어떤 상태든 그것이 당신의 부활 이야기의 시작입니다.
⸻
Locked Doors Cannot Stop Jesus
잠긴 문도 예수님을 막을 수 없습니다
English
The doors were locked, but Jesus still came in.
Your fear cannot keep him out.
Your doubt cannot keep him out.
His peace is the key that unlocks your life.
한국어
문은 잠겨 있었지만 예수님은 들어오셨습니다.
당신의 두려움도
당신의 의심도
그를 막을 수 없습니다.
그분의 평강이 당신의 삶을 여는 열쇠입니다.
⸻
Step Into Your Story
당신의 이야기로 나아가세요
English
Open the door.
Step out.
Live your resurrection story.
한국어
문을 여세요.
밖으로 나아가세요.
당신의 부활 이야기를 살아가세요.
⸻
Closing Prayer
마무리 기도
English
God of the risen Christ, help us embrace new life.
Give us faith over fear, courage over confusion, and trust to follow you.
As we open our doors, remind us of your presence and purpose. Amen.
한국어
부활의 하나님, 우리로 하여금 새로운 생명을 받아들이게 하소서.
두려움보다 믿음을, 혼란보다 용기를, 의심보다 신뢰를 주옵소서.
우리의 문을 열 때, 주님의 임재와 목적을 깨닫게 하소서.